유비는 어떤 경로를 통해 제갈량을 알게 되었나
동한말기, 군벌들의 전쟁이 빈번하고, 그 중 세력이 비교적 강한 군사집단들은 상대방을 격퇴시키
며, 자신들의 본거지를 마련하였다. 당시 조조의 본거지는 북방, 손권은 강동, 유일한 한 황실의 자
손 유비는 일정 본거지 없이 떠돌아 다니며 몸을 의탁하는 신세였다.이런 상황에서 유비의 현자(군
사)에 대한 갈망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갖고 사방팔방에 자신을 도와 한황실을 부흥시킬 수소문 현재
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당시 유능한 인재들을 가려내는 능력이 있던 사마휘는 그에게 충고 하기를
"책만 읽는 선비가 어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준걸(인
재)들만이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준걸이라 함은 와룡과봉추를 일컫는 말일 것이
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라 불리는 문사가 유비를 찾아 자신을 신하로 받아줄 것을 부탁했다.유비 또
한 그에 대한 호감이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는데, 서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말하며 자신의 친
구인 제갈량이야 말로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칭찬하며,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가 보길 청했다. 처
음에 유비는 서서가 제갈량을 찾아가 그를 모셔 오길 바랬으나, 서서가 말하길 "그를 찾아가 보는
것은 가능하나 그를 욕보여서는 아니됩니다. 주군께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고 생각합니다."<자치통감,건안12년>
그리하여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몸소 먼 시골 제갈량의 집까지 방문했다. 그마저 2번을 만
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3번째의 방문에서야 비로소 그를 만날 수 있었다.이것이 바로 유명한
삼고초려의 유래다.이 이야기는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훗날 제갈량의 <출사표>중 "선제께서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미천한 소신을 3번이나 찾아와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중략." 이후 삼고초려
란 현자에 목마른 이들이 인재를 구하는 것의 전형적이 예 혹은 인재를 존중하는 대명사가 된다.
그러나 위나라 사람이 지은 책에 따르면, 제갈량 스스로 유비를 찾아갔다는 주장을 펴고있다. 당시
유비는 형주목 유표에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유표라는 인물은 무능하고 전쟁에도 문외한이
였고,이때 전국통일이라는 웅장한 뜻을 품은 조조가 형주를 공격할 것을 우려한 제갈량이 서둘려
유비를 찾아가 대책을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 제갈량의 여느 선비
와 다를 바 없는 모습과 그 나이또한 매우 어려 유비의 태도는 냉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갈량의
세상을 보고 시국을 분석하는 뛰어난 능력과 그가 주장하는 바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였고 또한 유비의 마음과도 통하였다. 이 때서야 유비는 상객의 예를 갖춰 제갈량을 대
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주장은 그 뿐만 아니라 서징의 사마표의<구주춘추>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은 "삼고초려"의 유래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는데 건안 12
년,당시 제갈량의 나이는 27살의 청년이었고, 이미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진 황숙 유비가 그런 3번 찾
아가는 모욕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또한 제갈량이 천하의 뛰어난 재능과 뜻이 있고,
유비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왜 처음 2번은 그를 피해 만나지 않았을까?
일부 학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晉見說"이 역사의 진실에 부합한다고 한다.그 이유로는 첫째,제갈
량의 의지와 당시 상황에 따른 것이다. 당시 조조와 손권은 이미 각자 참모들과 장군을 모두 갖춘
상태였고, 유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제갈량
의 포부와 재능을 펼칠 기회를 줄 수 없었다. 이와 달리 유비는 비록 다른 이에게 몸을 의탁하는 신
세였지만 그 명성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인격도 훌륭하여 제갈량은 유비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유비를 찾아 당시 상황에 맞는 앞으로 유비의 행동방향과 목표를 제시하였고,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신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위나라사람이 쓴 책은 당대의 사람이 당대의 인물을 쓴 前 삼국지라 할 수있어 훗날의 삼국
지보다 믿을수 있다.셋째,제갈량의 출사표 중 삼고초려에 대한 언급은 제갈량 자신의 주장을 더욱
더 강조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민심을 안정시키면 투지를 증가시켜 빠른 시일내에 북벌대업
을 완성하기 위한 제갈량의 하나의 책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삼고초려"설과 제갈량 스스로 유비를 찾아갔다는 설 모두 가능하다. 청나라의 책에서
보면 제갈량이 처음 성에서 만났을때 유비는 예의를 차리고 제갈량을 대접하였으나 극진한 대접은
아니었다. 허나 후에 서서의 강력한 추천 후에 유비는 비로서 제갈량을 3번 찾아가 만나기를 청했
고, 두사람의 관계는 하나가되어 유비는 제갈량의 의견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제갈량 또한 유비
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오랜 시간 동안,삼국시대의 이야기의 매력과 유비가 현자를 찾는 노력등의 이유로 인하여 " 삼고초
려"설이 다른 학설보다 더 신빙성 있게 전해져왔다.하지만 어찌되었던간에 역사의 근본은 고증에
의한 것만이 진실이다.